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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컬처 2020. 3. 25. 09:00

우리가 을지로를 기억하는 방법,『을지로 수집』

을지로의 다양한 표정을 기록하다 - 『을지로 수집』 설동주 작가 

여행지에서 마음에 드는 풍경을 만난 뒤 이를 기억하는 방법은 사람마다 각기 다르다. 좋았던 순간을 떠올리며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감각적인 글로 추억을 되새기기도 한다. 『을지로 수집』의 저자이자 펜 드로잉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는 설동주 작가는 밤낮없이 누비며 바라본 을지로의 다양한 표정을 섬세하게 그려왔다. 흑과 백으로 선명한 대비가 두드러지는 그의 그림에는 다채로운 색감이나 향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동네를 향한 애정 어린 마음만이 느껴질 뿐이다.



펜 드로잉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나요

어린 시절부터 애니메이션, 영상 분야에 관심이 많아 애니메이션 감독이 되고 싶었어요. 성인이 된 이후로 애니메이션을 전공한 뒤 영상 회사와 광고 회사에서 일했지만, 20대 후반 즈음에는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이 과연 맞는 건지 회의감이 들더라고요. 그림 그리는 일이 좋아서 이 일을 시작한 건데, 회사에서는 정작 나만의 그림을 그릴 수가 없었으니까요. 결국 퇴사를 하고 1년간 호주로 워킹 홀리데이를 떠났어요. 구체적인 계획은 없었지만 그림으로만 먹고살아봐야겠다는 생각으로 길거리에서 캐리커처를 하며 돈을 벌기도 하고, 손님이 없을 땐 펜 드로잉을 가볍게 시도했어요. 노트와 펜만 쥐고 주변 풍경을 하나씩 그려나갔는데 생각보다 사람들의 반응이 좋아 계속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렇게 여러 가지를 시도하면서 꾸준히 작업한 덕분에 지금까지 펜 드로잉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할 수 있게 됐죠.



도시를 즐겨 그리고 계세요. 도시만의 특별한 매력이 있을까요

퇴사 이후로 해외여행을 많이 다녔는데, 웅장한 폭포나 고운 능선을 자랑하는 자연보다는 사람들이 활발히 교류하는 도시에서 안정감을 느꼈어요. 아무래도 도시에서 나고 자라다 보니 마음이 편하기도 하고, 특색 있는 가게와 사람들의 생활 문화를 살펴보는 재미도 있으니까요. 그렇게 여러 도시를 돌아다니면서 그림을 그렸는데 이걸 시티 트레킹이라고 이름 붙였어요. 보통 하나의 도시를 여행할 때마다 한 권의 노트에 기록하는데요. 작년에 뉴욕을 방문했을 때도 공항에서 대기하는 사람들의 모습부터 여유로운 분위기가 흘러넘쳤던 카페, 박물관에서 전시를 기다리는 사람들 등 사적인 여행의 기록을 그대로 담았죠. 이 때문인지 이전 작업을 넘겨보면 그날의 분위기와 냄새, 사람들의 움직임까지 세세하게 기억이 나요. 아무래도 도시를 관찰한 과정을 토대로 세밀하게 그리다 보니 잔상에 더욱 진하게 남는 것 같아요.



최근에는 작가님의 작업물과 을지로에서 활동하는 이들의 인터뷰가 담긴 단행본 『을지로 수집』이 출간됐어요. 서울 내 여러 직역 중에서도 을지로에 주목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사실 어릴 적 자랐던 마포구 염리동에서의 추억 때문에 을지로를 기록물로 남겨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염리동은 구불구불한 골목 사이로 오래된 주택과 상점이 있어 예스러운 분위기가 느껴지는 동네인데요. 개인적으로 오랜 시간의 흔적이 묻어난 것을 좋아하기도 하고 추억이 그대로 남아 있는 곳이라 자주 찾아갔었는데, 시간이 흘러 다시 가보니 재개발로 인해 일부 건물만 제외하고는 모두 허물어져 있더라고요. 재개발이 진행되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많이 기록했더라면 좋았겠다라는 안타까운 마음이 너무 컸죠. 그런 와중에 제가 자주 가는 을지로의 일부 구역을 대상으로 재개발이 이뤄진다는 소식을 듣게 됐어요. 그때부터 지금의 모습을 기억하고 싶은 마음에 을지로를 그려나갔고, 과거에 인연이 있었던 출판사 편집자가 이러한 의도에 공감해 책을 내보자는 제안을 해줬어요. 덕분에 을지로 수집이 나올 수 있었죠. 책에는 직접 찍은 사진부터 을지로를 배경으로 한 시티 트레킹, 이곳에서 활동하는 이들의 진솔한 이야기 등을 함께 담았는데요. 지역의 다채로운 매력을 살펴보며 느낄 수 있는 쏠쏠한 재미가 있습니다.



책에 등장하는 인터뷰이의 직종과 연령대가 굉장히 다양합니다. 인터뷰이는 어떻게 선정하셨나요?

7개 업체와 인터뷰를 진행했는데 꽤 어려운 과정이었어요. 그동안 미디어의 조명을 받지는 않았지만, 을지로에서 1년 이상 머물며 자신만의 철학을 바탕으로 일해온 이들을 만나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초기에는 기존에 알고 있던 지인들을 인터뷰했고, 그분들이 연결고리가 되어 또 다른 좋은 인연들도 만날 수 있었어요. 책에 등장한 인터뷰이들의 직종과 연령대도 각기 달라요. 어르신들의 단골 명소인 이발소부터 옛 다방을 계승한 카페, 홍콩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하게 하는 사진관 등이 등장하죠. 그중에서도 디자인 점빵이라는 인쇄 공방 사장님의 인터뷰에 대한 독자분들의 반응이 좋아요. 을지로와 충무로에서 지낸 세월을 허심탄회하게 말해주셨을 뿐 아니라 인쇄업이 어떻게 운영되는지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설명해 주셨거든요. 단순히 을지로를 들른다고 해서 알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기에 더욱 깊은 인상을 남겼다고 생각해요.



남녀노소 많은 이들이 을지로를 찾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을지로는 세계 어느 도시를 봐도 찾기 힘든 특색을 가진 동네죠. 어렸을 적 구경했던 인쇄소나 공업사 같은 오래된 가게가 변함없이 운영되는 동시에 새로 들어서는 공간도 기존의 분위기와 모나지 않게 잘 어우러지고요. 요즘에는 힙지로라 불리면서 젊은 세대 방문객이 몰리다 보니, 다양한 세대가 한 공간에서 식사하거나 길맥하는 모습도 심심찮게 볼 수 있어요. 한국이란 나라는 다양한 연령대와 직종의 사람들이 한 곳에 모이기 어려운 문화를 지니고 있는데, 이곳에서는 세대 간의 경계가 흐릿해지죠. 모든 것이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서울이란 도시 속에서 을지로는 과거와 현재가 각자의 자리를 지키며 공존하는 곳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더욱 매력을 느끼는 것 같아요.  
한 가지 덧붙이자면, 을지로가 70년의 세월을 간직할 수 있었던 것은 이곳에서 일하는 분들이 그런 가치에 공감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편집숍 오팔 사장님도 비슷한 말씀을 하신 적이 있어요. 이곳에 새롭게 둥지를 틀었지만 원래 터를 잡고 있던 이들의 라이프스타일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자연스럽게 스며들고 싶다고요. 이처럼 동네를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 덕분에 앞으로 을지로가 어떻게 변할지 한편으론 기대도 돼요.



을지로의 다양한 공간을 가보셨을 텐데,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곳이 있으신가요?

주변 지인들에게 꼭 가보라고 추천하는 곳이 있는데, 바로 세운 상가 옥상이에요. 세운상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옥상에 올라가면 청계천 일대부터 을지로, 충무로, 남산까지 서울 도심부의 풍경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어요. 탁 트인 모습이 좋아 그림으로도 담았죠. 또한 그야말로 을지로의 역사를 압축해서 볼 수 있는 곳인데요. 세운 상가와 가까운 곳에는 철공소나 인쇄소 등 낮고 오래된 건물이 나란히 줄지어 있고, 먼 곳으로 시선을 돌릴수록 고층 빌딩이 많고 건물의 형태도 다양해요. 현재는 옥상 바로 앞에 건물이 세워지고 있어서 이런 풍경을 볼 수 있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그래서 사람들에게 한 번이라도 더 보라고 권하고 있어요.



최근 을지로에서는 재개발이 추진되고 있습니다. 작가님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을지로 일대가 워낙 노후해 변화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에요. 다만 재개발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원래 을지로에 터전을 잡고 있던 이들과의 합의가 조금 더 활발하게 이뤄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에요. 상가 입주자, 건물주, 주민, 개발업자 등 이해관계자마다 재개발에 대한 견해가 워낙 다양한 만큼 서로의 의견을 열심히 공유하되 도시가 지닌 고유한 가치를 잃지 않는 방식으로 논의가 진행됐으면 좋겠어요.



그림을 통해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으신가요?

멜버른이나 뉴욕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도시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이 남달라요. 재개발을 진행할 때도 오래된 건물의 외형은 그대로 남겨둔 채 내부만 리모델링을 진행하죠. 자본도 훨씬 많이 들고 복잡한 작업이지만, 도시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가치관과 마음이 기본적으로 깔려 있어요. 그 마음은 사소한 애정과 관심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해요. 저는 그런 모습에 감동받았는데요. 저만의 방식으로 그런 가치관을 실천하고자 을지로의 다양한 풍경을 기록해왔어요. 이를 통해 사람들이 을지로란 지역을 관심 있게 바라보고 함께 도시의 미래를 고민할 수 있다면 좋겠어요. 앞으로도 을지로 이외에도 후암동, 만리동 등 서울의 다양한 모습을 수집하는 시티 트레킹을 꾸준히 이어갈 계획이에요. 더 많은 이들이 도시에 대한 애정을 조금씩 꽃피울 수 있도록 말이죠.  


컨텐츠 기획/제작 : 신한카드 X 어반플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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