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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AND/컬처&아트

을지로의 가치는 변하지 않는다 by 박찬일 쉐프

을지로가 요즘 뜨거워졌다. ‘지로라는 별명도 붙었다. 특히 을지로3가 지역은 빅뱅 수준으로 끓고 있다. 골뱅이골목이 있어 예전부터 직장인들이 몰리기는 했지만, 이처럼 압도적인 모습은 없었다. 을지로에 유명 대기업이 속속 들어서고, 새로운 유행까지 몰려오면서 이 지역은 대격변의 시대를 맞았다. ‘도무송’, ‘오프셋같은 정체불명의 인쇄 용어와 공가집 사이로 취향 가득한 가게들이 들어섰다. 심지어 고깃집조차 세련되어 얼핏 보면 카페처럼 보일 정도다. 아마도 인스타그램 피드와 블로그 콘텐츠에서 을지로가 차지하는 비율은 요 몇 년 사이 열 배는 넘게 증가했을 것이다. 대중은 새로운 것을 찾고, 특히 SNS는 이와 같은 쏠림 현상을 심화하는 데 일조한다. 벌써 을지로가 경리단길이나 가로수길처럼 되는 것 아니냐는 걱정을 하는 이들도 있다. 그만큼 이 동네가 유명세를 치르고 있다는 의미다.

 

 

 

을지로가 새로운 세대의 유입으로 화제가 될 수 있었던 건 이곳에 과거의 유산이 건재하기 때문이다. 골목길 안쪽마다 자리한 수수해 보이는 식당과 구멍가게는 보통 운영한 지 40~50년은 됐다. 오래된 것이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니지만, 이들이 보내온 세월 속에 서울의 지문이 고스란히 묻어 있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곳들이다. 사람들은 이를 사랑하고, 오늘날 이 지역에 새로 생긴 유행을 즐기고자 한다.

 

 

강남이 서울의 중추 역할을 하는 오늘날과 달리, 예전에는 서울살이를 위해 길 이름을 입체적으로 구성하는 게 중요했다. 그래야 약속을 잡을 수 있고 이동선을 가늠해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세로줄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가로줄이었다. 대개 찾아가고자 하는 장소를 가로줄(가로로 놓인 도로)로 설명하는 서울의 관습 때문이었다. 시내에서 제일 북쪽인 경복궁역에서 광화문, 창경궁으로 넘어가는 길부터 남쪽으로 종로-청계천-을지로-충무로가 쫙 머릿속에 그려져야 비로소 서울 사람이라 할 수 있었다. 그 가로 길을 익힌 후에야 세로길을 익히는 게 가능했다. 오늘날 강남에서처럼한 블록 건너와 같은 말은 당시에 쓰지 않았다. 대개 한 블록이면 바로 1가가 2가가 되고, 2가가 3가가 되는 작은 시내였던 까닭이다. 강북은 옛 서울 사람들의 공간 개념으로 지은 지역이라 생각보다 지역 인지 단위가 작다.

 

 

 

 

이때 도심 한가운데에 있는 을지로는 중심을 딱 잡아준다. 청계천을 따라 두툼한 영향력을 뻗치며 이어진 이 길은 도심의 활력 있는 중심 가로선을 의미했다. 과거에는 사람들이 을지로 일대에놀러 가는경우가 드물었다. 공구상과 각종 산업 소비재(조명, 위생도기, 건축자재), 인쇄 골목, 철공소가 모여 있는 지역이라 어른들이 볼일이 있어 찾는 동네라는 인식이 강했다. 물론 명보극장, 국도극장, 스카라극장 같은 유흥시설이 없는 것도 아니었지만, 이 일대 공간들은 대개 서울에서 산업 자재가 공급·유통되는 전문상가 지역의 색깔을 띠었다. 그렇다 보니 해당 지역에서 영업하는 식당이나 술집도 어르신들의 취향과 입맛에 맞는 가게가 많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우래옥, 조선옥, 을지면옥, 양미옥 같은 가게들이 바로 을지로를 중심으로 중구 곳곳에 소재한 가게들이다. 입정동, 인현동 등 정확한 행정동명은 따로 있으나 그냥을지로 몇 가라고 설명하는 게 위치적으로도 정확했고, 서로 설명하고 이해하기에도 편했다. 청계천 인근이나 을지로 지역에서 태어난 아주 오래된 서울 토박이들(이곳을 옛날엔 아랫대라고 불렀다)이나 동명으로 부르곤 했다.

 

 

 

이 동네에는 오래된 평양냉면 가게가 꽤 있다. 고향의 맛을 그리워하는 실향민들이 진을 치고 있었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좀 달랐다. 실향민보다 서울 토박이들의 더 많이 찾았다. 수적으로 많기도 했고, 서울 토박이들이 워낙 냉면을 좋아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시대의 작가 박태원의 소설 <천변풍경>에는 중인 계급이 많이 등장하는데, 책 속에서 냉면이나 설렁탕 등을 배달해 먹는 장면이 나오곤 한다. 을지로는 전통적으로 개화된 중인과 군인들이 많이 산 지역이다. 이들이 조선후기부터 장사와 기술자로 크게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고, 신분제가 철폐된 개화기에 특히 대활약을 했다. 상업과 생산이 활발하면 식당이 잘되게 마련이다. 오래전부터 을지로 일대에 맛있는 식당이 많았던 이유다.

 

 

 

 

을지로입구와 을지로2가 사이인 수하동에는 전설적인 국밥집이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문을 열어 지금도 성업하는 곳, 바로 하동관이다. 그러나 수하동 재개발 이후 자리를 명동으로 옮겼다. 하동관이 옮겨간 곳은 명동에 해당하지만, 을지로입구이기도 하다. 을지로입구는 식민지 경제 수탈의 첨병이었던 동양척식회사가 있었고, 나석주 의사의 폭탄 투척 의거가 벌어지기도 했던 곳이다. 전설의 국밥집이 그 자리에서 계속 영업하고 있었다면 여러모로 우리의 정신적 문화자산이자 도시자산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싶어 아쉽다. 수백 년 역사를 지닌 종로 초입 피맛골도 재개발해버린 역사를 떠올려 보면, 수하동쯤은 오히려 별문제라 여기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

 

 

앞서 을지로의 노포를 몇 개 거론했다. 그 카테고리에 조선옥, 을지면옥, 을지오비베어 등의 가게도 넣어야 한다. 조선옥은 일제강점기에 문 열어 서울의 외식 문화, 그중에서도 특히 소갈비라는 특정 음식의 역사를 스스로 몸에 새겨가는 집이다. 더 놀라운 건, 그 역사에 한몫한 81세의 노 주방장이 지금도 현역이라는 점이다. 그가 주인이 아니라 월급 받는 직원이라는 사실을 알면 크게 놀라 경악할지도 모른다. 우래옥의 홀을 책임지는 김지억 전무 역시 88세의 연세에 직원의 신분이라는 것도 밝혀두어야겠다. 한국에서 이처럼 오래 일한 직원을 둔 가게나 회사는 거의 찾아보지 못할 테니까.

 

 

을지로는 서울 600년 역사에서 늘 빠지지 않는 중요한 지역이었다. 세월의 흐름에 따른 변화에 맞춰 적절한 도시 계획 또한 필요하지만, 이 지역의 인문적 흔적을 부수는 식의 방법은 지양되어야 하겠다. 당대의 것은 우리 것이 아니다. 잠시 소중히 지키고 있다가 물려줘야 하는 대상이라는 말을 다시금 상기하게 된다.

 

 

컨텐츠 기획/제작 : 신한카드 x 어반플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