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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AND/컬처&아트

을지로를 을지로답게 만드는 것들

을지로는 지역 내 다양한 물성이 뒤섞이며 독특한 양감을 완성한다.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이곳만의 분위기를 즐기기 위해 사람들은 미로 같은 골목을 찾는다. 그렇다면 과연 지금 이 순간, ‘을지로답다라는 것은 무엇일까? 눈에 띄는 몇 가지 요소를 꼽아봤다.

 

 

 

 

을지로 Heritage

 

가게에 있어 간판은 아주 중요한 요소다. 가게를 상징하는 얼굴이자 고객을 가게 안으로 불러들이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대부분 간판이 눈에 잘 띄도록 애쓰기 마련이다. 하지만 을지로에서는 이 공식이 자주 깨진다. 문 닫은 가게의 옛 간판을 그대로 쓰는 것도 이곳에서는 더 이상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인쇄 골목 안에 자리한 철판 요리 전문점 다케오 호르몬 데판야끼는 그들의 업종과 상관없는 디지털 마스터'라는 커다란 간판을 달고 있다. 기존 간판을 떼는 대신 입구 옆에 '다케오'라는 작은 문패를 단 게 전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일에도 식사 대기 줄이 길게 늘어설 정도로 사람들이 물밀 듯 찾는다. 간판이 없어도(혹은 잘 보이지 않아도) 손님이 공간을 적극적으로 찾는 기이한 상황. 방문객 사이에서 이 역시 을지로답다고 여기는 암묵적인 이해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카페이자 바(Bar)인 에이스포클럽(Ace four club)의 출입문에는 이화다방이라는 상호가 붙어있다. 촌스러운 원색 스티커의 색상이며 최근 문 연 공간답지 않게 노후한 모양새다. 이전 다방에서 쓰던 오래된 나무문을 그대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권민석&김지연 부부는 자신들의 공간을 구 이화다방이라고 말한다. 60년 된 이화다방을 인수한 후 이를 개조해 새로운 공간으로 만들었지만, 낮에는 카페, 밤에는 바인 공간을 운영하는 이상 기존 공간의 다방이라는 정체성을 굳이 지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고. 오히려 이를 보존함으로써 을지로의 여타 힙플레이스와는 다른 그들만의 아이덴티티를 구축할 수 있었다. 권 씨가 유튜브로 직접 독학해 리모델링했다는 공간에는 이화다방의 흔적이 멋스럽게 녹아 있다. 기존 나무 벽을 최대한 살리고, 천장과 조명 역시 다방에서 쓰던 그대로 유지하면서 그들이 좋아하는 물건들로 내부를 채웠다. 이렇게 완성된 가게는 젊은 주인 부부의 세련된 취향과 세월을 품은 공간의 묵직한 무게감이 어우러져 남다른 매력을 자아낸다.

 

 

 

해외에는 100년 넘게 운영해온 가게가 많잖아요. 그 자체가 자부심이기도 하고요. 저희는 60년간 이어져 온 이화다방의 맥이 끊기지 않도록 이곳을 계속 운영해 나가는 게 목표예요. 그러다 언젠가 5대째 주인에게 넘겨줄 수 있다면 기쁠 거예요.”

 

에이스포클럽의 재미난 점은 중장년층 손님도 단골 가게에 들르듯 이곳을 편히 찾는다는 것이다. 다방이 여전히 운영되는 줄 알고 찾아온 기존 단골 어르신들이 싹싹하게 반기는 이들 부부의 가게로 들어와 자연스럽게 커피나 술을 한 잔씩 하고 가게 됐단다. 과거에 이화다방을 자주 찾던 손님들이 그대로 새 공간의 손님이 된 셈이다. 두 사람은 자신들을 이화다방의 4대째 주인이라 설명한다. 기존의 출입문을 그대로 놔둔 이유도 오래된 단골손님들이 60년간 운영된 그들의 아지트가 사라졌다고 생각할까 배려한 것이다. 그들은 을지로에는 다른 지역과 다른 특별한 힘이 있다고 말한다. 이곳에서 40~50년 우직하게 일해온 분들이 동네의 초석이 되어 주기 때문이라는 것. 을지로에서는 낡고 오래된 것의 가치가 쉽사리 퇴색하지 않는다. 오래된 유산(Heritage)은 버려지는 대신 새로운 공간에 이식되고, 어느새 지역의 특색으로 자리매김한다.

 

 

낡은 건물 속 낯선 사인

대표적인 도심 산업지인 을지로는 다양한 자재상과 공업소 및 인쇄소가 밀집된 독특한 생태계를 이루고 있다. 위치적으로 접근성이 좋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대중이 이 지역을 낯설어 한 가장 큰 이유는, 관련 업종에서 일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굳이 발 들일 일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특유의 좁고 미로 같은 골목은 새로운 방문객에게 진입 장벽으로 작용한다. 하지만 젊은 예술가와 소상공인이 을지로에 하나둘 모여들어 둥지를 틀면서, 휴대폰 속 지도 앱을 유심히 살피며 을지로의 골목을 배회하는 젊은이 무리를 쉽게 볼 수 있게 됐다. 오히려 그들 사이에서는 미로 같은 길을 따라 새로운 공간을 찾아내는 일이 일종의 유희로 여겨진다.

 

 

 

이 일대 대다수의 건물은 1960~1970년대에 지은 모습 그대로 오늘날까지 변함이 없다. 좋게 말하면 예스러운 정취가 남아있고, 나쁘게 말하면 낡을 대로 낡았다. 주변부의 고층 건물과 대비되는 거친 질감의 오래된 건물들은 어딘가 어둡고 무거운 인상을 준다. 그렇다 보니 을지로를 처음 접하는 이들 대부분은 낯선 곳에서 오는 두려움을 느낀다. 공간도, 그곳을 채우는 사람도, 투박하고 낯선 을지로 골목의 분위기는 외부인이 쉽게 접근하기 힘든 게 사실이다. 만약 용기 내 들어선다 해도 이 골목 끝에 무엇이 있을지, 혹은 이 계단을 올라갔을 때 위험한 상황과 맞닥뜨리는 것은 아닌지, 머릿속이 어지럽다.

 

 

 

 

이때, 매의 눈으로 주변을 살펴보면 낡은 건물 곳곳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는 네온사인을 발견할 수 있다. 뭔가 특별한 무언가가 숨어있음을 알리는 사인(sign)이다. 그곳은 필름 카메라 전문 스튜디오일 수도 있고, 숨은 와인 바일 수도 있으며, 디제잉 파티가 이뤄지는 LP 숍일 수도 있다. 튀기 위해 요란스럽게 굴지 않아도 이들이 조용히 불 밝히는 네온 불빛은 자연스럽게 눈에 띈다. '귀빈장'이라 적힌 촌스러운 원색 간판이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골목 안에서, 젊은 감각을 살린 네온사인은 그들의 정체성을 도드라지게 보여주는 동시에 기존 요소와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좁은 골목 안 바투 붙은 투박한 건물들과 어둠 속에서 빛나는 네온사인. 비범한 아우라는 험하기로 악명 높은 홍콩 뒷골목의 청킹맨션을 연상케 한다. 그야말로 서울이 아닌 낯선 세계 같은 곳. 어찌 이곳이 궁금하지 않을 수 있을까.

 

 

 

다층적인 로컬 콘텐츠

최근 을지로에서 새롭게 주목할 만한 곳이 있으니, 바로 세운상가다. 특히 세운상가와 대림상가를 다시 잇는 공중 보행교가 요즘 젊은 층 사이에서 을지로 루프탑이라 불리며 인기를 얻고 있다는 사실. 이 인기의 중심에는 대림상가 쪽 보행교 초입에 있는 다전식당이 있다. 가게 앞에 깔린 파랗고 빨간 간이용 플라스틱 테이블과 의자는 빈자리 하나 없이 만석이다. 테이블 위에는 너나 할 것 없이 철판 제육볶음과 추억의 경양식 돈가스, 빼곡히 늘어선 술병이 놓여 있다. 루프탑이라는 공간에서 흔히 기대하는 화려함이나 세련된 분위기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30 세대는 대기 줄까지 서가며 이게 바로 을지로만의 분위기라고 열광한다.

 

 

 

 

특히 누구나 오갈 수 있도록 열려 있는 보행교는 이곳을 찾는 불특정 다수에게 청계천 조망권을 선사한다. 청계천을 중심으로 을지로 일대의 풍경이 한눈에 시원스레 들어오는 풍경이다. 종묘 앞 층수 제한이 있어 세운상가 양옆으로 5층 높이 이상의 건물이 없는 덕분이다. 1968, 세운상가 준공 당시 3층 공중을 연결해 데크를 만드는 설계는 본래 차도와 분리된 보행로를 만들고자 한 것이었다. 하지만 8개나 되는 건설사와 각자 다른 조합 방식으로 개발을 추진한 탓에 부실 공사가 이뤄졌고, 이후 데크는 청계천 복원 사업으로 인해 철거되기도 했다. 이를 새롭게 되살린 보행교 위로는 오래전 건축가가 염원했던 대로 사람들이 여유롭게 오간다. 그 모습은 무미건조한 건물에 생동감을 불어넣는다.

 

 

 

 

한때 흉측한 유산이라 불리기도 했던 낡고 거대한 건물은 새로운 가능성을 품은 공간으로 발돋움하고 있다. 긴 세월 변함없이 가게를 운영하는 수많은 전자 기기 관련 업체들, 그 낯선 분위기 사이로 친근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오래된 맛집과 젊은이들이 꾸려나가는 새로운 감각의 가게들이 한데 뒤섞여 상가 곳곳을 채운다. 오늘날 세운상가를 이루는 다양한 층위의 콘텐츠는 수많은 사람을 끌어당기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를 을지로 전반에 대한 이야기로 치환해 봐도 무방하다. 결국 다층성이야말로 을지로 지역이 지닌 단단한 힘이고, 지금 이 순간 을지로를 가장 명확하게 정의하는 키워드일 것이다.

 

 

컨텐츠 기획/제작 : 신한카드 x 어반플레이